욕망을 어찌할꼬 (2/2)
Mental Muscle :
2009/08/12 03:07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 (a supreme creature)라고 부릅니다. 터무니 없는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 나름대로 "고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만물의 영장이그 지능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유력한 가설이 있습니다. 사회뇌 가설입니다.
호모사피엔스의 생존력은 사회성에서 옵니다. 여럿의 힘을 합치니까, 각각의 산술합보다 더 큰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럿이 함께 생활하다 보면,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합니다. 우선, "저놈"이 내게 호의적인지, 악의를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호의와 적의를 잘못 구분하면,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어떤 놈이 씩 웃는데, 이게 내게 선물을 주려고 웃는 건지, 나를 해칠려고 웃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너무 뻔하죠. 이 너무 뻔한게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연결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나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가 씩 웃어 줬는데, 상대방이 나의 의도를 호의로 해석하는지, 악의로 해석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가 호의로 웃어 줬더라도, 상대방이 악의로 해석했다면, 자칫 죽음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나의 관계에 대해 제3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 제3자가 내편을 들어줄지, 상대편을 들어줄지도 알아야 하고요. 이뿐 인가요. 상대방이 남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인지, 도움을 주는 사람인지도 알아야 하고요.
언뜻 복작해 보이는 이런 과정을 우리의 뇌는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처리합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고도"로 진화했기 때문이고요.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대 인류의 뇌에 가장 큰 부하를 준 복잡한 사회관계는 남녀관계였다고 합니다.)
즉, 복잡한 인간관계를 처리하다 보니, 인간의 뇌가 고도의 "성능"을 지니게 됐습니다. 인간의 지능은 바로 인간의 복잡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사회뇌 가설입니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 함은 "인간은 지적동물"이라고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위해 머리를 많이 굴리다 보니 머리가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능은 진화의 부산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규모와 인간의 지능은 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단지 사람 수가 많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일정규모 이상을 유지하려면, "나"에 대한 범주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갑돌이가 "나"라고 할 때 "나"는 갑돌이 개체를 의미하지만, 갑돌이 "나"는 갑돌이의 가족이나 친척에까지 확장됩니다.
인간이 "나"의 범주를 갑돌이의 혈연수준까지만 확장할수 있는 수준일 때, 인간은 부족사회 정도의 문명을 이뤘습니다. "나"의 범주를 혈연에서, 민족으로 확장했을 때, 국가단위 정도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지구"촌"이란 개념이 나왔다는 것은 "나"의 범주를 모든 인류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회성, 지능과 욕망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사회성이 인간의 기본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사회성, 혹은 소속감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회적 욕구를 다양한 방법으로 충족시킵니다.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할 때 "나"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개체 "나"만 나가 아닙니다. 확장된 "나"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 중 과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끄는게 이타주의 (altruism)입니다. 인간은 남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종종 희생하는데, 이게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존 경제학의 틀에서 볼땐 더더욱 말이 안되는 행동입니다. 이익을 극대화하기는 커녕 스스로 손해보는 행동을 하니 말입니다.
1997년 사회심리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이 이타주의 본질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기도 했습니다. 밧슨 (Batson)선생과 치알디니 (Cialdini) 선생(설득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바로 그 분입니다)이 논쟁의 주역입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이타주의 본질이 이기주의냐 아니냐"입니다. 밧슨 파에서는 남을 돕는 순수한 이타적 동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치알디니 파에서는 "순수"한 이타적 동기란 없고, 이타주의는 궁극적으로 이기주의라고 했습니다.
이 논쟁은 현재도 진행중이지만, 치알디니파로 승세가 기울고 있습니다. 이타적 행동을 분석해보면, 늘 이기적 동기가 깔려 있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도움을 받는 상대방이 도움을 주는 "나"와 다른 "남"이 아니란 것입니다. 순수한 의미의 "남"은 없고, "남"은 확장된 "나"라는 것입니다. 나와 남은 하나 (oneness)라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하나이므로, 그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는 돕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돕는 것이니, 이타적 행동은 이기적 동기에 의한 것입니다. 이를 하나됨 가설 (Oneness hypotheses)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면부지라 해도, 최소한 같은 호모사피엔스이고, 설사 같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도, 같은 영장류이고, 설사 같은 영장류가 아니라도, 같은 포유류이고, 설사, 같은 포유류가 아니라도, 같은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한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불교에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하지요. 아마도 이런 이유때문에 심리학자들이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욕망의 틀을 바꾼다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으셨을 겁니다.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나"를 개체인 "나"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확장된 "나"의 욕망충족으로 보는 것. 이것이 욕망의 틀을 바꾸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내"가 먹는 것보다, 나의 확장된 자아, 나의 아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의 쾌락이 더 큰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한국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땃다는 것 역시, 확장된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쾌락이 되는 것이고요.
이런 설명이 조금 허탈합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 그냥 좋은 이야기 정도로만 들리니까요. 그런데, 그 뻔한 이야기, 그냥 좋은 말이 괜히 뻔하고, 괜히 좋은 말이 된게 아닙니다.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뻔한 진리가 된 것입니다. 한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과정에서, 걸러지고, 걸러지고, 또 걸러지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선택된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단지 갑돌이 개체의 욕망만 충족시키는게 아니라, 확장된 갑돌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쾌락은 일종의 인지과정입니다. 무엇에 대해 쾌락을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생존에 도움을 주는 것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과정이라 할수 있습니다.
남을 나의 확장으로 보는 것이 인간의 생존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을 돕는 것이 쾌락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호모사피엔스의 생존력은 사회성에서 옵니다. 여럿의 힘을 합치니까, 각각의 산술합보다 더 큰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럿이 함께 생활하다 보면,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합니다. 우선, "저놈"이 내게 호의적인지, 악의를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호의와 적의를 잘못 구분하면,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어떤 놈이 씩 웃는데, 이게 내게 선물을 주려고 웃는 건지, 나를 해칠려고 웃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너무 뻔하죠. 이 너무 뻔한게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연결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나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가 씩 웃어 줬는데, 상대방이 나의 의도를 호의로 해석하는지, 악의로 해석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가 호의로 웃어 줬더라도, 상대방이 악의로 해석했다면, 자칫 죽음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나의 관계에 대해 제3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 제3자가 내편을 들어줄지, 상대편을 들어줄지도 알아야 하고요. 이뿐 인가요. 상대방이 남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인지, 도움을 주는 사람인지도 알아야 하고요.
언뜻 복작해 보이는 이런 과정을 우리의 뇌는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처리합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고도"로 진화했기 때문이고요.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대 인류의 뇌에 가장 큰 부하를 준 복잡한 사회관계는 남녀관계였다고 합니다.)
즉, 복잡한 인간관계를 처리하다 보니, 인간의 뇌가 고도의 "성능"을 지니게 됐습니다. 인간의 지능은 바로 인간의 복잡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사회뇌 가설입니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 함은 "인간은 지적동물"이라고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위해 머리를 많이 굴리다 보니 머리가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능은 진화의 부산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규모와 인간의 지능은 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단지 사람 수가 많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일정규모 이상을 유지하려면, "나"에 대한 범주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갑돌이가 "나"라고 할 때 "나"는 갑돌이 개체를 의미하지만, 갑돌이 "나"는 갑돌이의 가족이나 친척에까지 확장됩니다.
인간이 "나"의 범주를 갑돌이의 혈연수준까지만 확장할수 있는 수준일 때, 인간은 부족사회 정도의 문명을 이뤘습니다. "나"의 범주를 혈연에서, 민족으로 확장했을 때, 국가단위 정도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지구"촌"이란 개념이 나왔다는 것은 "나"의 범주를 모든 인류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회성, 지능과 욕망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사회성이 인간의 기본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사회성, 혹은 소속감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회적 욕구를 다양한 방법으로 충족시킵니다.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할 때 "나"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개체 "나"만 나가 아닙니다. 확장된 "나"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 중 과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끄는게 이타주의 (altruism)입니다. 인간은 남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종종 희생하는데, 이게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존 경제학의 틀에서 볼땐 더더욱 말이 안되는 행동입니다. 이익을 극대화하기는 커녕 스스로 손해보는 행동을 하니 말입니다.
1997년 사회심리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이 이타주의 본질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기도 했습니다. 밧슨 (Batson)선생과 치알디니 (Cialdini) 선생(설득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바로 그 분입니다)이 논쟁의 주역입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이타주의 본질이 이기주의냐 아니냐"입니다. 밧슨 파에서는 남을 돕는 순수한 이타적 동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치알디니 파에서는 "순수"한 이타적 동기란 없고, 이타주의는 궁극적으로 이기주의라고 했습니다.
이 논쟁은 현재도 진행중이지만, 치알디니파로 승세가 기울고 있습니다. 이타적 행동을 분석해보면, 늘 이기적 동기가 깔려 있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도움을 받는 상대방이 도움을 주는 "나"와 다른 "남"이 아니란 것입니다. 순수한 의미의 "남"은 없고, "남"은 확장된 "나"라는 것입니다. 나와 남은 하나 (oneness)라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하나이므로, 그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는 돕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돕는 것이니, 이타적 행동은 이기적 동기에 의한 것입니다. 이를 하나됨 가설 (Oneness hypotheses)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면부지라 해도, 최소한 같은 호모사피엔스이고, 설사 같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도, 같은 영장류이고, 설사 같은 영장류가 아니라도, 같은 포유류이고, 설사, 같은 포유류가 아니라도, 같은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한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불교에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하지요. 아마도 이런 이유때문에 심리학자들이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욕망의 틀을 바꾼다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으셨을 겁니다.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나"를 개체인 "나"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확장된 "나"의 욕망충족으로 보는 것. 이것이 욕망의 틀을 바꾸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내"가 먹는 것보다, 나의 확장된 자아, 나의 아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의 쾌락이 더 큰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한국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땃다는 것 역시, 확장된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쾌락이 되는 것이고요.
이런 설명이 조금 허탈합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 그냥 좋은 이야기 정도로만 들리니까요. 그런데, 그 뻔한 이야기, 그냥 좋은 말이 괜히 뻔하고, 괜히 좋은 말이 된게 아닙니다.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뻔한 진리가 된 것입니다. 한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과정에서, 걸러지고, 걸러지고, 또 걸러지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선택된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단지 갑돌이 개체의 욕망만 충족시키는게 아니라, 확장된 갑돌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쾌락은 일종의 인지과정입니다. 무엇에 대해 쾌락을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생존에 도움을 주는 것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과정이라 할수 있습니다.
남을 나의 확장으로 보는 것이 인간의 생존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을 돕는 것이 쾌락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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