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행복
Mental Muscle :
2009/07/05 04:44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아냐, 난 불행하게 사는게 좋아!"라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행복이란게 참 묘한 구석이 있어, "행복, 행복, 행복..." 하며 따라다니면, 항상 저 멀리 떨어져 있지, 내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돈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은 사람의 행복을 보겠습니다. 돈! 좋은 겁니다.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좋은 집에 살수 있고, 잘 생긴 이성과 살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각종"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돈이 아주 많으면 정말로 "모든" 욕망이 충족될까요?
불가능합니다. 돈은 유한하지만,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두뇌는 항상 적응합니다. 끼니 걱정할 땐 그저 쌀밥에 고깃국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쌀밥에 고깃국 삼일만 먹으면 인간의 뇌는 쌀밥과 고깃국은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 전전하다 내집 마련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지만, 내집에서 1년만 살아보면 더 큰 집, 더 좋은 동네에서 살고 싶은 또다른 욕망이 생깁니다.
이런 현상은 심리학자들은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에서 맴돌 뿐 저 앞에 잡힐 것 같은 행복은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쳇바퀴에서 나올 수도 없습니다. 달리기를 멈추면 그나마 현상유지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문제라면, 욕망을 버리기만 하면 될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욕망이란 것은 버릴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바로 그 욕망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욕망이 있어야 앞으로도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욕망은 우리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내는데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을 제공하는 힘이 근원입니다. 그 욕망의 대상은 돈, 지위, 혹은 지식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 욕망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살수 밖에 없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진화했습니다. 진화론을 인류에게 가르쳐준 다윈 역시 그렇게 진화한 인간의 하나였습니다.
다윈 역시 여느 인간과 다름없이 쳇바퀴 안에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느 인간보다 훨씬 더 열심히 달렸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인류의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지만, 정작 다윈은 자신의 삶에 그리 만족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자서전에서 다윈은 연구에 몰두하다, 시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자체를 잃어버린 그의 모습에 후회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다윈 자서전을 읽은 것은 아니고, 다윈처럼 일벌레로 산 것을 후회한 감정연구의 권위자 바바라 프레드릭슨이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을 삶을 후회하는 글에서 본 내용입니다. 바바라 프레드릭슨은 긍정 감정의 권위자인데, 지독한 일벌레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바바라, 넌 감정이 없으니까 감정연구하는 거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연구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윈이 연구에 미쳐 젊은 날을 일벌레로 지내지 않았더라면 진화론이 세상에 나오는데, 더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다윈이 아닌 다른 일벌레가 진화론을 체계화했겠지요.) 프레드릭슨이 일벌레가 아니었더라면, 인류는 기분좋은게 뭐가 좋은 것인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을 것이고요.
굳이 다윈과 프레드릭슨 말고도 세상엔 일벌레들 많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일벌레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 덕에 이렇게 블로그도 하고, 멋진 자동차도 타고 다니고, 에어콘 세게 틀어, 한여름에 춥게 지내는 사치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욕망이란게 인간이 버릴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아주 특별한 몇몇 개인은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인간이 욕망을 내려 놓는 순간, 인간은 그 존재자체가 없어질 겁니다.
그렇다면, 욕망을 내려놓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수 방법은 없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욕망과 맞서 싸우는게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겁니다. 유도처럼 말입니다. 유도는 힘이 세다고 되는 운동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힘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나에게 가해지는 힘을 상대방에게 되돌리는 기술이 핵심입니다.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이란 힘이 나에게 가해지면, 행복하게 살기 정말 힘듭니다. 그 힘을 다른 사람에게 가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즉, "나, 나, 나"하며, "나"를 중심에 놓으면 욕망이 힘이 나에게 가해지게 됩니다. "나의 기분, 나의 행복, 나의 쾌감..." 이렇게 항상 나를 중심에 놓고 쾌락을 찾게 되면, 그 쾌락은 순간일 뿐이고, 지속되질 않습니다. 그 다음엔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나 나 나"하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행한 편입니다. 우울증에도 더 잘 걸립니다.
즉, 욕망을 다스린다는 것은 욕망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는 성철스님이 딱 2개 남기셨다는 주례사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주례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남이 내 덕을 볼 때 정말로 인간이 쾌감을 느끼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했습니다. 뇌영상 사진도 찍어 보고, 피를 뽑아 어떤 화학물질이 피속에 흐르고 있는지도 분석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항상 일치했습니다. 쾌락을 담당하는 뇌부위가 활성화되고, 쾌락과 관련된 물질에 피속에 돌고 있었습니다. .
참 역설적이지요. 그런데, 그게 인간이 수백, 수십만년동안 진화해온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돈으로 행복을 살수 있을까요?
네, 살수 있습니다. 단, 남을 위해 쓸 때 돈은 행복을 줍니다.
왜 그럴까요?
돈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은 사람의 행복을 보겠습니다. 돈! 좋은 겁니다.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좋은 집에 살수 있고, 잘 생긴 이성과 살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각종"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돈이 아주 많으면 정말로 "모든" 욕망이 충족될까요?
불가능합니다. 돈은 유한하지만,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두뇌는 항상 적응합니다. 끼니 걱정할 땐 그저 쌀밥에 고깃국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쌀밥에 고깃국 삼일만 먹으면 인간의 뇌는 쌀밥과 고깃국은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 전전하다 내집 마련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지만, 내집에서 1년만 살아보면 더 큰 집, 더 좋은 동네에서 살고 싶은 또다른 욕망이 생깁니다.
이런 현상은 심리학자들은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에서 맴돌 뿐 저 앞에 잡힐 것 같은 행복은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쳇바퀴에서 나올 수도 없습니다. 달리기를 멈추면 그나마 현상유지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문제라면, 욕망을 버리기만 하면 될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욕망이란 것은 버릴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바로 그 욕망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욕망이 있어야 앞으로도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욕망은 우리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내는데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을 제공하는 힘이 근원입니다. 그 욕망의 대상은 돈, 지위, 혹은 지식 그 자체일수도 있습니다. 욕망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살수 밖에 없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진화했습니다. 진화론을 인류에게 가르쳐준 다윈 역시 그렇게 진화한 인간의 하나였습니다.
다윈 역시 여느 인간과 다름없이 쳇바퀴 안에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느 인간보다 훨씬 더 열심히 달렸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인류의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지만, 정작 다윈은 자신의 삶에 그리 만족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자서전에서 다윈은 연구에 몰두하다, 시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자체를 잃어버린 그의 모습에 후회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My mind has changed during the last twenty or thirty years... Now for many years I cannot endure to read a line of poetry… I have also almost lost any taste for pictures or music… My mind seems to have become a kind of machine for grinding general laws out of large collections of facts...
If I had to live my life again I would have made a rule to read some poetry and listen to some music at least once every week… The loss of these tastes is a loss of happiness, and may possibly be injurious to the intellect, and more probably to the moral character, by enfeebling the emotional part of our nature.
- 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제가 직접 다윈 자서전을 읽은 것은 아니고, 다윈처럼 일벌레로 산 것을 후회한 감정연구의 권위자 바바라 프레드릭슨이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을 삶을 후회하는 글에서 본 내용입니다. 바바라 프레드릭슨은 긍정 감정의 권위자인데, 지독한 일벌레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바바라, 넌 감정이 없으니까 감정연구하는 거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연구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윈이 연구에 미쳐 젊은 날을 일벌레로 지내지 않았더라면 진화론이 세상에 나오는데, 더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다윈이 아닌 다른 일벌레가 진화론을 체계화했겠지요.) 프레드릭슨이 일벌레가 아니었더라면, 인류는 기분좋은게 뭐가 좋은 것인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을 것이고요.
굳이 다윈과 프레드릭슨 말고도 세상엔 일벌레들 많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일벌레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 덕에 이렇게 블로그도 하고, 멋진 자동차도 타고 다니고, 에어콘 세게 틀어, 한여름에 춥게 지내는 사치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욕망이란게 인간이 버릴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아주 특별한 몇몇 개인은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인간이 욕망을 내려 놓는 순간, 인간은 그 존재자체가 없어질 겁니다.
그렇다면, 욕망을 내려놓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수 방법은 없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욕망과 맞서 싸우는게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겁니다. 유도처럼 말입니다. 유도는 힘이 세다고 되는 운동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힘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나에게 가해지는 힘을 상대방에게 되돌리는 기술이 핵심입니다.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이란 힘이 나에게 가해지면, 행복하게 살기 정말 힘듭니다. 그 힘을 다른 사람에게 가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즉, "나, 나, 나"하며, "나"를 중심에 놓으면 욕망이 힘이 나에게 가해지게 됩니다. "나의 기분, 나의 행복, 나의 쾌감..." 이렇게 항상 나를 중심에 놓고 쾌락을 찾게 되면, 그 쾌락은 순간일 뿐이고, 지속되질 않습니다. 그 다음엔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나 나 나"하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행한 편입니다. 우울증에도 더 잘 걸립니다.
즉, 욕망을 다스린다는 것은 욕망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는 성철스님이 딱 2개 남기셨다는 주례사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주례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남의 덕 내가 보겠다"가 아니라, 내 덕을 다른 사람이 보게 하면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덕을 봐, 즐거울 때 느끼는 쾌감이 보통이 아니란 겁니다.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 마음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결혼식장에서
약속한 것 다 지키고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검은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거나,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는가 물으면,
"예" 하며 약속을 해놓고는
3일을 못 넘기고
3개월, 3년을 못 넘기고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
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해 놓고는
살면서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럼 안 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해놓고
안 살수도 없고 이래 어영부영하다가
아이가 생기니까 또 아이 때문에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아이고 웬수야”합니다.
이렇게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생 고생하다가 나이 들면서
겨우 포기하고 살만하다 싶은데,
이제 또 자식이 애를 먹입니다.
자식이 사춘기 지나면서 어긋나고
온갖 애를 먹여 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식 때문에 고생하며 삽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할 때는 다 부러운데,
한참 인생을 살다보면
여기 이 스님이 부러워,
"아이고 저 스님 팔자도 좋다!
"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스님이 되는 것이 좋으면 처음부터 되지,
왜 결혼해 살면서 스님을 부러워합니까?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
돌고 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이 아닌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
"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줘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또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습니다.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하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살만하니까 웃고 사는데,
요새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가보지만 가봐도
별 볼 일이 없으니까,
괜히 결혼했나 후회가 됩니다.
결혼식하고 며칠 안 돼서부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부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 신랑신부 혼수 구하러 다니다가
의견차이가 생겨서 벌써 다투게 됩니다.
안 했으면 하지만 날짜 잡아놔서
그냥 하는 사람들도 제가 많이 봅니다 .
오늘 이 자리의 두 사람이
여기 청년 정토회에서
만나서 부처님법문 듣고 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분하고 살면서,
저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좀 덕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 않겠느냐,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보를 잘못 가져놓고
자꾸 사주팔자를 보려고 합니다.
궁합본다고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깥 궁합, 속 궁합 다보고 삼 년을 동거하고
살아봐도 이 심보가 안 바뀌면
사흘살고 더 못삽니다.
그러니 이 하객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니까
괜히 둘이 잘살면 심보를 부립니다.
남편에게 "왜 괜히 바보같이
마누라에게 쥐어 사나?
이렇게 할 것 뭐 있나?”하고,
아내에게는 “니가 왜 그렇게
남편에게 죽어 사나?
니가 얼굴 이 못났나? 왜 그렇게 죽어 사노?”
이렇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며,
결혼할 땐 박수를 치지만 내일부터는
싸움을 붙입니다.
이런 말은 절대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괜히 심술을 놓는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남편에게
덕되는 일 좀 해야 되겠다.
남이 뭐라 그러던, 어머니가
뭐라
그러던 아버지가 뭐라 그러던,
누가 뭐라 그러던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딱 굳혀야 합니다.
괜히 애까지 낳아놓고 나중에
이혼한다고 소란 피우지 말고 지금 생각을
딱 굳혀야지.
그렇게 하시겠어요?
덕 봐야 돼요?
손해 봐야돼요?
"손해보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분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분의 마음이 딱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아내의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이 오장육부가 편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임신해서 아이를 갖게 될 때 영가들도
죽을 때 초조 불안해 죽은 귀신도 있고,
편안하게 도 닦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편안한 데는 편안한 게 인연을 맺어오고,
초조 불안하면 초조 불안한 것이
딱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잉태라고 합니다.
태교가 아니고,
잉태할 때 여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선신(善神)을 잉태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악신(惡神)을 잉태합니다.
처음에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보려고 했는데 손해를 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같이 자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기도하고 정성 다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 가지고
더부덕 덥덥 하다보니까 애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처음부터 태교가 잘못됩니다.
이렇게 잉태해 가지고는
성인 낳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면, 나중에 위를 해부해보면
소화가 안되고 그냥 있습니다.
이 자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장육부하고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짜증을 내면
오장육부가 긴장이 되어있습니다.
안에 있는 아이가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선천적으로
신장질환이 생기든지 아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원기가 늘 따뜻하게 돌고,
아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나중에 태어나도
선천적으로 도인처럼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애를 가진 이는
편안해야 합니다.
편안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편안한 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바로 남편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편이 애는 좋은 애를 낳고 싶으면서
아내를 걱정시키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고,
나쁜 것은 안 보여주고,
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거들어
줘야합니다.
시어머니들도 손자는
좋은 것을 보고 싶은데,
며느리를 들볶으면 손자가
나쁜 애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편안하도록
해줘야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편안한 것이 제일 좋고,
주위에서도 이렇게 해줘야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중요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다.
육식을 조금하고 채식을 많이 하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이렇게 해야
애가 좋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를 낳은 후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이서 서로 싸운다면 안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 배우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 배우고,
일본에서는 일본말 배우고,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원숭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아이의 심성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조그만 하다고
애를 옆에 두고 둘이서 짜증내고 다투면,
사진 찍듯이 그대로 아기 심성이 결정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 주정하고
그러면 아이가 나는 크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할거야
하지만 크면 술 주정합니다.
다투는 집에서 태어나면
자기는 크면 절대로 다투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면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모방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낳으려면
직장을 다니지 말아요.
아니면 3년은 직장을 그만두어요.
아니면 아이를 업고 직장에 나가든지.
이렇게 해서 아이를 우선적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하려면 아이를 낳고
안 그러려면 안 낳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복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망치는
고생덩어리가 됩니다.
애 때문에 평생 고생하고 살게됩니다.
3년까지만 하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안 하려면 낳지를 말고
낳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좋고 자식도 좋고
세상도 좋습니다.
잘못 애 낳아서 키워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첫째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
제가 신도 분들 많이 만나보면,
애 때문에 시골 살면서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두 부부는 아이가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 가십시요.
돈도 필요 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여기도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차리십시오.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의 중심이
서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좋고 가정이
화목한 것을 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를 해야합니다.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내 부모만 좋게 생각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떠냐?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그런데 늘 자식보다는 부모를 그러나,
첫째가 남편이고 아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돼야
자식의 교육이 똑바로 됩니다.
애를 매를 들고 가르칠 필요 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면
안됩니다.
누굴 닮겠습니까.
둘을 닮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인연을 잘 지어서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수 있습니다.
두 부부는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합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잉태 할 때와 뱃속에 있을 때,
세살 때까지가 중요하니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부부가 화합해야 합니다.
주로 결혼해서 틈이 생길 때 애가 생기고,
저 남자? 못살겠다 할 때,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저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 중학교까지 잘 다니다가
고등학교 가더니 그렇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러니 이미 아이가 그렇게 되었거든
지금 엎드려서 참회를 하여야 고쳐집니다.
지금 이 부부는 안 낳았으니까
반드시 그렇게 낳아야 합니다.
세 번째, 남편을 아내를 서로 우선시 하고
자식을 우선시 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남편이나 아내를 우선시하고
둘째가 부모를 우선시해야 하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부모를 우선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번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번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 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사회의 여러
가지도 함께 기여를 하셔야 합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재미가 있고,
비가 세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두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밖에 가서
사업을 해도 사업이 잘되고,
뭐든지 잘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생각만 고집해서 살면
결혼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이 마음 죽을 때까지
내생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따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살지 않아도,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제가 부주 대신 이렇게 말로
부주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과학자들은 남이 내 덕을 볼 때 정말로 인간이 쾌감을 느끼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했습니다. 뇌영상 사진도 찍어 보고, 피를 뽑아 어떤 화학물질이 피속에 흐르고 있는지도 분석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항상 일치했습니다. 쾌락을 담당하는 뇌부위가 활성화되고, 쾌락과 관련된 물질에 피속에 돌고 있었습니다. .
참 역설적이지요. 그런데, 그게 인간이 수백, 수십만년동안 진화해온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돈으로 행복을 살수 있을까요?
네, 살수 있습니다. 단, 남을 위해 쓸 때 돈은 행복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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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좋은 글 감사드려요
저도 감사합니다.
"덕을 보자."
상당히 날카로운 표현이네요.
항상 누구의 덕을 보고 살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손해는 보고 살지 말자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했거든요.
당연히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면서요.
이글을 읽으니까 상당한 반성이...
오히려 행복하게 살려면 지금부터라도 손해를 봐야 겠죠?
네, 저도 성철스님 주례사 보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저도 결코 손해는 안보려고 했거든요. 참 역설적이지요.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게 행복해지는 길이라니 말입니다.
오랜만에 흥미진지하게 몰두해서 글을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근데, 결혼도 안해 본 스님이 참 잘아시네요.^^; 결혼을 안해보셔서 그런가?
그렇죠 ^^; 바깥에서 바라 보는 사람이 더 정확하기 때문일까요?
문득 궁금한게 생겼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 (생리적욕구, 안전욕구,사회욕구,존경욕구,자아실현욕구...이타적욕구..)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1. 생리적욕구(식욕,성욕..) = 본능
2. 기본적욕구(생리,생물학적/사회,심리학적) = 본능
3. 모든 욕구 = 본능
흔히 본능하면, 생리적욕구 혹은 기본적욕구라고 생각하는데..
문득, 인간의 모든 욕구는 그게 저차원이든 고차원이든 상관없이, 모두 본능에서 비롯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 3가지 중 어떤게 답일까요???
모든 욕구는 본능과 함께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상호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듯 합니다.
욕구는 본능적인것도 있고, 학습에 의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성욕이나 식욕같은 것은 본능이겠지만, '흡연'같은 것은 학습(경험)으로 인한 욕구같네요..